헛점많은 이상주의자 :)

180902 본문

카테고리 없음

180902

은아:) 2018. 9. 2. 19:34



용이가 내가 생각 난다고 했던 " 남아 있는 나날 (The remains of the day) 中"



1.

  "스티븐스 씨,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?  제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른답니다.  그래요, 사실입니다.  집을 나온 게 이번까지 세 번쨰죠,"

 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었고 나는 도로 맞은편 들판만 내다보고 서 있었다.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. 

  "스티븐스 씨, 당신은 지금 제게 남편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를 묻고 있는 것 같군요"

  "그럴 리가요, 벤 부인, 내가 어떻게 감히..."

  "어쨌든 꼭 답변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, 스티븐스 씨. 당신도 말씀하셨듯이 이제 우린 오래도록 다시 못 볼지도 모르니까요. 그래요, 저는 남편을 사랑합니다. 처음에는 아니었어요.  처음 오랫동안 은 아니었어요.  그 옛날 달링턴 홀을 떠나올 떄만 해도 제가 정말, 영원히 떠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답니다.  그저, 스티븐스 씨 당신을 약 올리기 위한 또 하나의 책략쯤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.  그러나 막상 여기로 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, 저는 큰 충격을 받았지요.  그 후 오랫동안 저는 무척이나 불행했어요.  이루 말할 수 없이 ...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고 전쟁이 지나가고 캐서린이 장성했어요. 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남편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.  누구하고든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그 사람한테 익숙해지게 마련이죠.  남편은 자상하고 착실한 사람이에요. 그래요, 스티븐스 씨, 이제 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."

  그러고는 다시 침묵을 지키던 켄턴 양이 잠시 후 말을 이었다.

  "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. '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.'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.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,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'더 나은'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. 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. 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트집잡아 화를 내며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아요.  하지만 한 번씩 그럴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.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. 하긴,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. 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. 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,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."

  그 떄 내가 곧바로 무슨 대꾸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.  켄턴 양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는데 1~2분 정도 걸렸으니까.  게다가 그녀의 말에는, 여러분도 짐작하겠지만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. 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? 실제로 그 순간,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.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. 

 "옳은 말씀이에요, 벤 부인. 말씀하신 대로 시간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. 그래요, 그런 이유들 때문에 당신과 부군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.  당신도 지적했듯 우리는 '지금 현재'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.  그리고 얘기를 들어 보니 벤 부인, 당신도 만족하실 만한 여건입니다.  조만간 벤 씨가 은퇴하고 손자도 보게 될테니 두분 앞에도 행복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군요.  이제는 정말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당신 자신과 당신 몫의 행복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될 겁니다."

  "지당하신 말씀입니다. 스티븐 씨. 정말 감사합니다"

  "아, 벤 부인, 저기 버스가 오는 것 같군요."

  내가 뛰어나가 버스에 신호를 보내는 사이에 켄턴 양도 일어나 대합실 가장자리로 나왔다. 나는 버스가 정차한 뒤에야 켄턴양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두 눈이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.  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.

  "자, 벤 부인, 부디 몸조심해야 합니다. 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, 퇴직 후의 인생이야말로 부부 생활의 황금기라고, 당신과 부군에게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요. 벤 부인, 혹시 다시 못 보게 될까 싶어 당부 드리는 것이니 부디 명심하기 바랍니다."

  "명심할게요, 스티븐 씨, 고맙습니다. 여기까지 태워 주신 것도 고마웠고요, 여러 가지로 너무나 잘해 주셨어요. 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."

  "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, 벤 부인."

  


2.

  "물론 내가 현재의 주인을 모시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은 크게 다릅니다. 그분은 미국 신사이시지요"

  "미국인요? 하긴 요즘 시절에 그럴 여력이 있는 건 그 사람들 밖에 없지요. 그러니까 당신은 그 집과 함께 남았군요.  일괄 거래에 낀 한 품목으로서"

  그가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.

  나도 슬쩍 웃으며 말했다.

  "예, 말씀하셨듯이 일괄 거래의 한 품목이었죠."

  노인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리더니 숨을 깊이 들이켜 흡족하게 한숨을 내쉬었다.  그리고 얼마간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.  

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.

  " 사실 나는,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. 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. 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."

  노인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으므로 나는 계속 말했다."

  "새 주인인 패러데이 어르신께서 도착하신 후로 내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, 무던히도 애써 왔습니다.  그분께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봉사를 하려고 말입니다.  그런데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무슨 일을 하든 지난날 내가 설정했던 기준들에 한참 미달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.  나의 작업에서 점점 더 많은 실수들이 나타나고 있어요. 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죠. 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입니다. 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들이에요.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압니다.  나는 맹세코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요.  나는 주어야 했던 것을 줘 버렸습니다. 달링턴 나리께 모두 줘 버려지요."

  "저런 형씨, 손수건이 필요해요? 내가 어디 넣어가지고 왔는데, 아 여기 있군. 아주 깨끗한 거라오, 아침에 내가 코만 한 번 풀었어요. 이걸 써요, 형씨"

  "아니, 괜찮아요. 고맙지만 됐습니다.  미안합니다.  여행을 하다보니 좀 지쳤나 봅니다. 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."

   "그 나리인가 뭔가 하는 양반한테 애착이 컸던 것 같군요.  돌아가신 지 3년째라고 했죠? 내가 볼 때 그 양반한테 너무 집착했어요, 형씨"

  "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. 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.  그리고 그 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.  나리는 용기있는 분이셨어요. 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. 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.  알겠습니까? 나는 '믿었어요.' 나리의 지혜를.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. 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. 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"

  "이봐요, 형씨.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, 만약 나에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.  알겠어요? 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됩니다. 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.  그래요,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. 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?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.  나를 봐요,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답니다.  그래요, 우리 둘 다 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."

  그러고 나서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.

  "즐기며 살아야 합니다. 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. 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. 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.  내 생각은 그래요. 아니, 누굴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.  하루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"



3.  

  노인이 자리를 뜬 후 20여 분 지났지만 나는 방금 막 치러진 이벤트, 즉 선창의 전등에 불이 켜지는 행사를 기다리며 계속 이 벤치에 앉아 있다.  즐거움을 찾아 선창에 모여든 사람들이 이 작은 이벤트 앞에서 행복해하는 걸 보니, 앞서 말했듯 대다수 사람들에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때라고 한 내 말동무의 이야기가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든다.  그리고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,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한 그의 충고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.  하긴 그렇다. 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?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,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. 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. 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? 여러분이나 나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'노력하는' 것으로 충분할 것같다. 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.


  

Comments